2013/4/23 재미없어보이는 당신들이 재밌다
비가온다
잠은 일찍 깼지만 어제 새로운 칵테일을 만드느라 고량주를 400ml나 마신탓에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8시에 눈을떠서 13시가 지나도록 자리에 누워있었다
작년인가 어머니 아는분이 보험을 하시는 바람에 생명보험 하나를 가입했었는데 그게 해지가 되어서 남은 보험금을 돌려받으라고 어머니께 문자가 왔다.
보험을 가입할때는 내가 그자리에 없어서 팩스하나만 보내면 되던데 보험금을 받으려면 지점까지 직접 가야 하다니 참 그렇다.
미래에셋 이라고 검색하니 신촌에 하나가 있더라. 신촌에 사는건 참 여러모로 편리하다고 생각하며 찾아가서 휴면보험금을 돌려받으러 왔다고 하자 '고객님 여기는 미래에셋 증권입니다' 라고 했다. 아 그러네 보험이랑 증권이랑 다른거구나, 미래에셋 생명은 여의도나 영등포로 가야한단다. 나오면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신촌에서 종로가는 버스가 많으니 종로쪽을 찾아보기로 했다.
충정로에 한군데가 있어서 충정로로 갔다. 엄청 높은빌딩에서 11층만 미래에셋 생명이었다.
엘레베이터를 타려하는데 옆에 어떤 여성이 양념통닭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5개나 들고 탔다. 어딘가에 배달을 가는 거겠지.
엘레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중년남성과 짧은 인사를 했다 단골인가보다.
여자는 뭔가 불안한듯 불편한듯 문에 얼굴이 닿을만큼 바짝 붙어서서 문이 열리자마자 내렸다.
보험사에 가서 보험금을 환급받는데 보험사는 은행처럼 창구가 있고 그런게 아니라 그냥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은 100평정도는 될듯 넓었는데 거의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뭔가 쓸쓸해보였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담배냄새가 물씬 풍기는 뚱뚱한 아저씨 두명이 주식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니까 당연히 1층을 가겠지하고 안눌렀는데 8층에서 모두가 내리더니 엘레베이터가 다시 올라갔다.
이 건물은 18층에 흡연구역이 있는듯했다. 18층에서 다시 담배냄새가 나는 아저씨들이 타고 그들이 다시 9층, 8층에서 내렸다.
보험사에서 나와서 이까지 온김에 예전에 선배의 친구가 은행에 새로 들어갔다며 하나 개설해달라고 해서 못이겨 만들었던 제일은행 계좌도 없애버리기로 했다. 제일은행도 지점이 많지 않아서 진작 못 없애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스탠다드차티스가 제일은행인지 몰라서 처음에 좀 당황했다.
은행창구 직원은 이름이 '하얀' 이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은행원은 좀 피곤한듯 피부트러블이 좀 있었다. 전형적인 은행원다운 친절에 나는 무심히 계좌 없애주세요 라고 말했는데 그때 눈이 직원의 스테이플러로 갔다 스테이플러에 여고생 글씨로 ' 얀's ' 라고 적혀있었는데 갑자기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때쯤 애처로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증권사의 찌들어있는 아저씨들, 그 아저씨들은 너무나 촌스럽고 못생겼고 뚱뚱했다. 기름이 줄줄흐르는 얼굴에 엄청나게 튀어나온 배.매일 똑같이 그렇게 숨막히게 조용하고 좁은공간에 앉아서 하루종일 컴퓨터앞에 앉아있겠지. 은행원은 자기 기분이 어떻든지 앞으로 몇십년 그자리에 앉아서 손님들에게 428번 고객님~ 을 부르고 환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만족도 평가에 동그라미 한번만 쳐주세요' 그래야 겠지.
버스타고 오는데 이화여대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여자가 구석자리에 앉아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악을 쓰고 공부해서 좋은 회사 들어가도 저렇게 살건데 뭘 그리 기를쓰고 이 흔들리는 버스에서 책을 붙들고 있나
뭐 이렇게 잔뜩 회의에 젖어있었다. 버스에서 가득찬 사람들을 한명씩 보는데 옷차림들이 다들 너무 촌스러웠다. 왜 요즘 세상에 이렇게 촌스러운 옷들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거지, 뭘 그렇게 아둥바둥 사는거지, 그렇게 열심히 살아봐야 뭐 좋을게 있다고 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비오는날 버스를 타고 어디를 그렇게 가고 있는건지 그게 뭐 그렇게 가치있는 일인건지, 오늘 그런 촌스러운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하고 이버스에 꽉꽉 들어차 어딘가로 가고 있을것을 예상했을까, 아까 그 치킨 배달하는 여자는 30대 초반에 자기가 양념통닭 5마리를 들고 남들 회사에 배달을 하고 있을것을 어릴때 한번이라도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여자보다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을 회사원들 은행원들의 표정이 그 여자보다 더 밝았나.
내가 그사람들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렇게 함부로 말하나
그래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야 사는건가 뭐 그렇게 재밌는 일을 해야만 사는건가
인생에 대단한 큰 일을 하지 않아도, 자아를 딱히 실현하거나 업적을 세우지 않아도
바쁘게 힘들게 살아가는 와중에 조그만 재미거리들 하나씩 하면서 살아가는거지
버스에서 내려서 아현동 뒷길로 내려오는길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다 클로즈업 되어서 보였다
반지의 제왕 첫장면에서 샤이어 마을 사람들의 사는 일상들이 간달프가 가는 길을 따라 비춰지듯
야채가게에 모여앉아서 비를 바라보고 있는 아주머니들, 어깨동무를 하고 우산을 나눠쓰며 분식집앞에 줄 서있는 중학생들, 어떤 아이들은 반팔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내옆을 지나가고, 내 바로 옆에 있던 문에서 목발을 집은 아저씨가 나오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이발소 간판, 카센터 앞에서는 할아버지 몇분이 장기를 두고 계시고, 빵집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 뭐 이렇것들이 하나하나 너무나 극적으로 스쳐갔다
갑자기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일상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단한 일상이고 예쁘지 않은 배경인데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화가였다면 이사람들 한명한명을 모두 화폭에 담았을텐데, 아니면 지금 내가 보는 장면들을 모두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마치 이런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삶의 모습같았다. 김홍도와 신윤복도 나처럼 느끼고 그런 그림들을 많이 그렸던 걸까. 그림 잘 그렷으면 참 좋았을텐데.
버스에 김광석 님이 부른 노래로 이루어진 뮤지컬이 곧 나온다는 광고가 붙어있었다. 하루에 '김광석'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그 노래를 몇번이나 듣는건지 모르겠다.
김광석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지 모르겠다. 버스에 타니 라디오에서 '일어나'가 작게 나오다가 페이드 아웃 되었다. 그렇게 듣고 듣고 또 들은 김광석 노래, 막장으로 치닫는 아침드라마, 장기한판, 일이 끝나후 친구 가족들과 함께하는 치킨한조각 소주한잔 그런것들이 바쁘게 매일같이 똑같은 삶을 고단하게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삶의 재미이고 행복이고 목적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매일저녁 맥주를 한잔하며 '이 맛에 산다'고 말하는거 그래 진짜다 죽으면 맥주 첫모금의 그맛도 더이상 못보지.
나는 어떡하나 나는 그들이 참 재미없어 보이는데 그들을 보는게 참 재밌다.
마르고 닿도록 듣고 들을 좋은 노래 한곡을 불러 그들의 삶에 재미를 하나 더해주고 싶다, 분위기 좋고 저렴한 술집하나를 차려 그들이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다보면 나도 어느새 그 그림안에서 아둥바둥 고단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지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누군가가 보기에는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